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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머리

문예당 | 기사입력 2007/07/22 [13:59]

뒤바뀐 머리

문예당 | 입력 : 2007/07/22 [13:59]


인도의 장단과 한국의 장단, 인도의 가면과 한국의 가면, 그림자극, 가림막을 통한

연극적인 장면전환, 그리고 보살춤 등의 무용으로 이어지는 무용동작 등.

인도와 한국이라는 지역적, 문화적 상이함을 떠나 연극이란 장르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공연의 기호를 실험하기 위한 장으로서, 다양한 연극적 원천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작업을 위한 텍스트로서 이 작품을 선택했다.

따라서 이번 작업은 새로운 공연 언어를 찾기 위한 실험이 될 것이다.



머리와 몸이 뒤바뀐 기가 막힌 사연!

누가 제 남편인가요



        
“누가 너의 남편이냐?”

극단 작은신화
  
      
뒤바뀐 머리


2007년 7월 25일~ 8월2일

상명아트홀 2관 (평일 8시 / 토, 일 4시, 7시 / 월공연 있음.)


원작 : 토마스 만/ 기리쉬 카나드

각색 : 조현진

연출 : 이 곤

출연 : 백현주, 서광일,, 홍성호, 이현주, 조헤인, 오현우, 김석이.


기획 : 여유,작 (이수현 , 김옥진, 이혜리)

무대디자인 : 임건수  / 조명디자인 : 유은경  / 의상디자인 : 강기정  /

장치 및 마스크 디자인 : 배준호

인형 및 소품 디자인 : 임은주  / 작곡 : 김백찬  / 안무 : 김예리  / 노래지도 : 김은지

악사 : 김진혁, 이신애, 임지혜, 김영진  / 조연출 : 박상훈


관람가 : 일반 15,000원 / 학생 12,000원

공연문의 : 02-3673-5580


작품개요

머리와 몸이 뒤바뀐 기가 막힌 사건! 제 여자라니까요! 누가 제 남편인가요?

아라비안 나이트 보다 재미있고, 솔로몬의 재판보다 흥미진진하다!

<뒤바뀐 머리>는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다.


완벽한 머리를 갖고 있으나 몸이 부실한 남편. 그리고 완벽을 몸을 지난 남편의 친구.

여인은 과연 누구를 사랑하는가?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한 두 남자의 머리를 붙여 다시금 살아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남편과 친구의 몸과 머리가 뒤바뀌는 사건이 벌어진다!

진짜 남편은 누구인가? 머리를 가진 자인가, 몸을 가진 자인가?

그리고 그녀가 진정 사랑하는 남자는 누구인가?

<뒤바뀐 머리>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들 보다 진기하고, 솔로몬의 재판보다 버금가는

흥미진진함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작품소개
인도 신화의 이색적 소재를 바탕으로 풀어내는  “머리와 몸”의 이야기

-2006년 작은신화 20주년 기념 공연에 이어 새로이 선보여.

2006년 극단 작은신화 20주년 기념 공연  “각양각색” 시리즈 중 하나였던,

이곤 연출의 <뒤바뀐 머리>가 2007년 새롭게 선보인다.


단연 돋보이는 소재와  이야기로 많은 관심을 받았던 연극 <뒤바뀐 머리>는 짧은

공연기간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연극 <뒤바뀐 머리>는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소설

‘뒤바뀐 머리(The Transposed Heads)’와 인도 극작가 기리쉬 카나드(Girish Kanard)의

희곡 ‘하야바다나(Hayavadana)’를 바탕으로 각색된 작품이다.



이곤 연출은 인도의 신화와 독일의 문학을 매개로 현재 몸짱, 얼짱 열풍에 몸살 앓는

한국의 정서를 불어 넣는다.


남녀의 사랑과 아이러니 속에 감쳐진 “몸”이 정치학을  살펴본다.

현대사회는 이성과 육체의 절묘한 줄다리기를 시도하면서 시시각각으로 서로의 중요성과

상품성에 대해서 논한다.


<뒤바뀐 머리>는  결국 머리와 몸 무엇이 중요한가? 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제 현대 한국 사회는 남녀노소의 구분을 떠나 “몸”의 정치학을 적용하는 사회에

이르렀다.“


그 어느 나라보다 유교적인 정서가 큰 나라에서의 그러한 것은 의외적인 일.

<뒤바뀐 머리>는 몸과 머리가 엇갈린 남녀의 사랑과 아이러니 속에서 이성과 몸 무엇이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되묻는다.


작가소개

토마스 만 [Mann, Thomas, 1875.6.6~1955.8.12]



“독문학 사상 전환점에 위치한 20세기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문명 비평가”

뤼베크의 부유한 곡물상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형 H.만(1871∼1950)과 장남

K.만(1906∼1949)도 모두 작가였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면서 뮌헨대학에서 미술사•문학사

등을 청강하였으며, 한편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키 작은 프리데만 씨》(1879),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 Die Buddenbrook》(1901)을 발표하고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어 《트리스탄 Tristan》(1903) 《토니오 크뢰거 Tonio Kröger》(1903)와 단편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1912)을 발표하였다.


점차 정치적 양심에 눈을 뜨게 된 그는 독일제국이 붕괴하고 독일공화국이 탄생하는

현실적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문학적 유럽주의를 정치적•윤리적으로 보강하여, 후에

그 자신이 민주주의적 인류종교라고 이름 붙인 입장(세계시민주의의 입장)을 확립해 갔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완성된 《마의 산》은 죽음과 과거에만 집착하였던 초기의 우울한

귀족적 의식을 억제하고 삶과 미래에 봉사하는 사랑의 휴머니즘으로 향해 간 정신적

변화과정을 묘사한 작품으로, 1929년에는 마침내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국외강연여행에 나선 그는 그대로 망명생활에 들어가

스위스에 거주하여 독일의 국내사정을 조용히 살피면서 구약성서 중의 《창세기》에서

취재한 4부작 《요셉과 그 형제 Joseph und Seine Bruder》를 발표하였다.


1938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교의 초빙교수로 초청되어 미국으로 이주한 후 미국 내의

14개 도시에서 〈찾아올 민주주의의 승리〉 〈이 평화〉 〈자유의 문제에 대하여〉 등의

강연을 하였으며, 1944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1940년부터 1945년 5월까지 BBC 방송을

통하여 독일국민에게 히틀러 타도를 호소하는 반(反)나치스 정기방송을 계속하였다.


1954년에는 그의 생애에 걸친 자기고백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장편소설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회상록의 제1부》(1954)를 발표하였는데,

사기꾼의 인생 행로를 통하여 예술 및 예술가의 문제를 추구한 이 작품이 그의 최후의

작품이 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1955년 8월 12일 F.실러 사망 150주년

기념식 참석차 독일 여행 중 발병하여 취리히로 되돌아와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연출소개

연출가 - 이 곤



작은신화의 차세대 연출가

<밀드우드><뒤바뀐머리>등을 통해 차분히 자신의 세계를 쌓아 올리고 있는 연출가 이곤.

그는 2007년 한국연극지가 뽑은 주목할 만한 젊은 연출가 중의 한 명이다.

작은 신화의 차세대 연출가로 그의 작품은 분명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올해 여름 다시금 <뒤바뀐 머리>를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의 한 계단을 더 오르려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전문사

고려대학교 중어중문 전공


<주요작품>

연출작

   한국 페스티발 앙상블 ‘페르귄트’(호암아트홀) 연출 / 한국 페스티발 앙상블

  ‘쇼팽과 조르주 상드’(아르코 대극장) 연출

   극단 작은신화 ‘뒤바뀐 머리’(아룽구지 소극장) 연출/

   순천시립극단 정기공연 ‘날보러와요’ 연출

   극단 적 ‘밀크우드’ 연출 (아르코 소극장) /

   극단 작은신화 공동창작 워크샵 ‘소원이 있나요’

   연출 (혜화동1번지 소극장)


작품 줄거리


이 작품은 인도의 설화집 Kathasaritsagara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토대로 토마스 만이 쓴

소설 이를 바탕으로 인도작가 기리쉬 카나드가 각색한 희곡

<하야바다나> 다시 각색한 것이다.


미모의 여인 파드미니는 매우 지적이고 고귀한 가문 태생인 젊은 남자 데바닷타와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는 남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멋진 몸과 민첩한

실천력을 지닌 대장장이 카필라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세 사람이 여행을 하는 도중 질투를 느낀 데바닷타는 칼리 여신의 사원에서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한다.

이를 발견한 카필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친구가 자신 때문에 자살한 걸 깨닫고 역시

목을 베어 자살한다.


겁에 질린 파드미니는 칼리 여신에게 이 두 사람을 살려 달라고 기도한다.

칼리 여신은 그녀의 소망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겁에 질린 파드미니는 그들의 몸에 머리를 서로 바꾸어 붙였다.


과연 누가 파드미니의 남편인가? 머리를 가진 사람인가? 몸을 가진 사람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인도의 설화에서는 머리가 모든 사람의 몸 중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머리를 가진 사람이 진정한 그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에서 토마스 만은 또 하나의 가정을 한다.

만일 머리가 몸을 지배한다면 몸은 머리에 따라서 변화할 것이다.

결국 바뀐 몸은 다시 머리에 맞게 변하고 파드미니는 카필라를 찾아 길을 떠난다.




연출의도   by 이곤


몸이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세상.  인간은 머리가 먼저일까? 몸이 먼저일까?  
    
현대 사회에서 몸과 머리가 갖는 의미를 되짚어 본다.

이 희곡은 인도의 전통 설화집 Kathasaritsagara에 나오는 이야기를 토마스 만이 서구적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쓴 단편소설 “뒤바뀐 머리 (Transposed Heads)”를 각색한 희곡이다.


인도의 설화 Kathasaritsagara에서는 머리가 모든 사람의 몸 중에서 으뜸이기 때문에

머리를 가진 사람이 진정한 그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에서 토마스 만은 또 하나의 가정을 한다. 만일 머리가 몸을 지배한다면 몸은 머리에

따라서 변화할 것이다.  


만의 소설의 결말에선 바뀐 몸이 다시 머리에 맞게 변하고 그들은 다시 처음의 모습대로

돌아간다.  


“토마스 만이 살았던 이성중심주의적 시대에서는 머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머리는

몸에 따라간다는 결론이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다시 몸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머리보다 몸이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기도 한다.

따라서 요즘의 관객들은 이 희곡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희곡을 통해 관객들은 머리가 우선이냐 몸이 우선이냐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떠나 진정한 완전함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완벽한 머리와 완벽한 몸을 가지는 것이 완벽함일까?


이 희곡에서는 완벽함이란 느끼는 사람의 주관에 많이 달려있지 않느냐는 암시를 띠며

막을 내린다.

하지만 절대적인 완벽함이란 없듯이 이 희곡 역시 관객이 몸과 머리 그리고 완벽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다양할 여지를 남겨두는 미덕을 보였다.


인도와 한국 그 본질적인 공통성을 인도연극의 양식성과 한국연극의 양식성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찾는다.

모든 전통연극들은 그 근본에 들어가면 상당히 비슷해진다. 관객들 앞에서 실연되는

장르라는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이 공연을 위한 준비 워크샵을 거치면서 인도연극의 양식성이 한국의 전통극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많이 발견했다.

인도의 장단과 한국의 장단, 인도의 가면과 한국의 가면, 그림자극, 가림막을 통한

연극적인 장면전환, 그리고 보살춤 등의 무용으로 이어지는 무용동작 등.


인도와 한국이라는 지역적, 문화적 상이함을 떠나 연극이란 장르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공연의 기호를 실험하기 위한 장으로서, 다양한 연극적 원천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작업을 위한 텍스트로서 이 작품을 선택했다.

따라서 이번 작업은 새로운 공연 언어를 찾기 위한 실험이 될 것이다.


작품설명 by 이곤, 조현진


연극 ‘뒤바뀐 머리’는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소설 ‘뒤바뀐 머리(The Transposed

Heads)’와 인도 극작가 기리쉬 카나드(Girish Kanard)의 희곡 ‘하야바다나(Hayavadana)’

를 바탕으로 각색되었다.


이 이야기의 최초 원전은 AD 1070, Somadeva가 지은 Kathasaritasagar라는 설화집에

포함돼 있다.

이 책은 악마가 왕 Vikramadiya에게 짧은 이야기들을 한 뒤 마지막에 질문을 던지고

이 질문에 왕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뒤바뀐 머리는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이다.


마다나순다리(Madanasundari)라는 여자는 남편 다발라(Dhavala)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녀의 오빠가 방문해 여신 파바티(Parvati)의 축제에 여행 가자고 한다.

여행 중에 남편은 파바티의 신전에 들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고, 잠시 뒤 남편을

찾으러 간 그녀의 오빠도 슬픔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뒤이어 마다나순다리도 신전 안으로 그들을 찾으러 갔으나 죽은 그들을 발견하고

목매달아 죽으려 한다.


하지만 두 아들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데 대해 흡족한 여신이 다시 그 둘을 살려주기로

한다. 그런데 당황한 마다나순다리는 그 둘의 머리를 바꿔 붙인다.

이까지의 이야기를 한 뒤  악마는 질문을 던진다. “

누가 마다나순다리의 남편인가?”

왕은 대답한다. “남편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 남편이다.

왜냐하면 머리는 몸을 다스리고 정체성은 머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왕은 감성보다 이성의 우위를 인정한 것이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짐머가 20세기 초 이 얘기를 다시 썼다.

짐머는 아내가 머리를 바꾼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의문을 던졌고,

남편은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에 자살했으리라 추측했다.


1940년에 쓰여진 토마스 만의 소설은 짐머의 이야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머리가 바뀐

후의 이야기는 모두 그의 창작이다.


토마스 만은 두 인물의 카스트의 차이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는 인도에서의 카스트를 아리안이라는 외래문명(브라만 사상)이 드라비다의 토착문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폐쇄적 위계구조라고 해석했다.

소설은 두 가지 본성(브라만의 머리와 드라비다의 몸)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주며 나치의 Superhuman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카나드는 서구로 수입된 인도의 전통을 다시 역수입했다.

그리고 서구문명으로의 수용과정에서 생긴 여러 오해와 오류들을 다시 인도의 전통 안에서

수정했다.


그는 만의 소설을 각색해 약샤가나(Yakshagana)라는 인도 민속극 형식 안에 집어넣었다.

민속극은 낮은 카스트가 즐기는 연희형태이다. 카나드는 낮은 카스트가 즐기는 민속극이

주류의 사상과 체계를 비판하고 전복시키는 우리나라의 마당극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또한 이성을 중시하는 브라만적 사고를 전복시키기 위해 코끼리 머리를 가진 완전함의 신

가네샤를 찬양하고, 말의 머리를 가진 반인반마 하야바다나의 머리가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몸이 말이 되어 완전함에 이른다는 역발상의 결말 등을 시도한다.




우리는 이 ‘몸과 머리의 분리와 재결합?’ 이라는 화두가 지금 다시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점점 더 사회는 스마트화 되어가고 있고 머리와 몸, 정신과 육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만연하고 있다.

과연 인간의 존재는 정신과 육체로 이분되어 설명 되어 질 수 있는 것일까?



카필라와 데바닷타는 자아를 확립하지 못한 채 섣불리 서로를 동경했지만 사랑, 결혼,

출산, 고행, 죽음 등 삶의 통과의례를 경험하며 점차 자신의 본질에 다다른다.

머리가 바뀐 후 몸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지키고자 하는 본능에 의한 귀결이다.


카필라는 현실에 강한 의지적 인물로 이 과정에서도 데바닷타 보다 적극적이다.

자신의 본질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고행을 한다.

카필라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적극성 때문이다.


데바닷타는 오히려 어긋난 본질에 머무르고자 하는 속내였으나 몸은 순리에 따라 본질로

회귀한다.

이로써 데바닷타 역시 아무리 파드미니를 사랑하여 카필라처럼 되기 위해 노력한다해도

자신의 본질은 데바닷타임을 안다.

이런 대전제 위에 치러지는 마지막 그들의 결투는 싸움이 아닌 오히려 화해와 결합의

의식이다.

결투의 중심에 서있는 파드미니는 이 극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다.

변덕스럽고 충동적이며 때로는 이해 불가하다.

선과 악이 혼재하는 칼리 여신과 닮은 듯도 하다. 그녀는 카필라에게 반했으면서

데바닷타와 결혼하고, 몸으로는 카필라를 입으로는 데바닷타를 부르고, 그녀의 머리는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지만 발은 그 길을 따라간다. 그녀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이다.

불완전함은 인간의 본질이다.

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완전해지려고 노력함으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닐까?

본질을 파헤친다는 것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잔인한 문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본질을 깨닫고 완전해지는 순간은 오직 죽음을 맞이할 때 뿐이기

때문이다.


감성과 이성 사이의 균열된 틈을 위태롭게 혹은 행복하게 걷는 우리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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