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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없다. "Utopia in Emptiness_그곳의 유토피아" 전희경展,롯데갤러리,

경영희 기자 | 기사입력 2017/11/26 [20:50]

유토피아는 없다. "Utopia in Emptiness_그곳의 유토피아" 전희경展,롯데갤러리,

경영희 기자 | 입력 : 2017/11/26 [20:50]


청춘은 지금 방황 중.
청춘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관대하기 어렵다.
살아있는 한 겪게 되는 자신과의 가장 큰 전투의 시기.

 

 

역설의 장
유토피아(Utopia)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다. 현세의 그림자건, 시공을 초월한 꿈이건, 이상국(理想國)과 도원경(桃源境)은 현실 속에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꾸고, 그곳에서 본능처럼 낙원을 떠올린다. 현실의 고통이 더할수록 선명해지는 유토피아. 분명 아이러니다. 
 
여기, ‘유토피아’의 간판이 내걸린 전시가 있다. 유토피아라는 간판을 보면서 사람들은 곧장 행복한 안식처를 떠올릴지 모른다. 하지만 전시타이틀인 ‘공허 속의 유토피아Utopia in Emptiness’ 와 작품면면의 조형요소들을 짚어보면서, 우리는 전희경작가의 이 올 오버 (all over) 페인팅들이 결코 천국의 노래가 아님을 알 게 된다. 실상은 청춘이 겪는 번뇌와 갈등에 대한 역설의 장임을 깨닫는 순간, 먹먹함과 답답함이 엄습해 올 수도 있다.
 
구름과 골짜기들을 닮은 유기체적 형상들은 충분히 천국의 지형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뒤엉키고 뒤섞이고, 흐트러지고 흐르는 이미지들, 그리고 묘사인지 그저 붓질인지 그 경계도 분명치 않은 구성들은 ‘해피송’으로 보기 어렵다. 이처럼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도)가 최고조인 공간은 차라리 그녀가 그간 꾸역꾸역 집어삼킨 고통의 배설물이나 토사물의 흔적이라는 통찰에 손을 들게 된다.

 

▲ 몽상도,324x130cm,캔버스 위의 아크릴, 2014     ©전희경

 

▲ 생_몽상도,96x162cm,캔버스 위의 아크릴, 2014     © 전희경

 


 
필연적인 배설
작품에 진정성이 담기기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처연한 배설의 장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순조로운 엘리트 코스로의 행보가 ‘화가로 성공하기’의 필수보증이 될 수 없다는 현실적 깨달음, 정작 작업에 몰두해야 할 시간의 대부분을 학비벌이에 쏟게 된 예비작가 시절의 자괴감, 그리고 내밀한 개인사에 얽힌 상실감 등이 한 청춘의 속을 검게 태웠다.
 
“ 이런 상태가 20대를 지배했어요. 이상실현을 위해 현실에서 열심히 일해서, 멀어져 가는 꿈을 악착같이 잡으려고 쫓아 뛰는… 그런 삶을 살다 보니 그 간극, 괴리가 나의 삶이자, 그 괴리감이 나를 살게 하는 것 같았어요…
나의 삶과 주변의 삶 역시 비슷하잖아요. 우리 인간은 이상, 목표, 꿈, 등을 자의나 타의적으로 설정해놓고 막 달리는… 근데 그 이상이라는 것이 잡으면 더 이상 이상이 아니고, 못 잡으면 또 좌절하고… 그게… 순환되는 고리구나… 하지만, 간극이 좁혀지고 넓혀지고 하는 것이 나를 이 현실에서 지탱해 주는구나…”

 


‘장뇌’의 숭고함
고통은 고스란히 작품에 베어 든다. 당시 작업들에 대해 그녀는 “괴물같이 변하고 의도치 않는 촉수가 자라나는 오브제들” 이었다고 회상한다. 자신이 매일매일 걸어가는 길이 궁극적인 목적지와 어긋나고 있다는 불안감이 카오스의 세계로 터져 나오기 시작. 배설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 유토피아라고 부르고 있는 그 세계다.
 
실제로 그녀가 2006년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인 작품들은 긴 꼬리의 외눈박이, 촉수가 여럿 달린 얼룩이 등의 ‘오브제 조각(object sculpture)’이었다. 그저 괴물이라 통칭하기엔 석연치 않은 이 오브제들은 아메바, 짚신벌레 등의 원생동물이나 히드라, 말미잘 등의 자포동물을 빼 닮았다. 
 

▲ Desire of Growing Stimuli(series) 4x8x3cm, 혼합매체, 2006     ©전희경

 

 

 
▲     ©전희경

 
이들의 공통점은 두뇌대신 장이 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인간 생명유지에 근본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두뇌가 아닌 ‘장뇌’인데, 두뇌가 멈춰도 숨이 멎지 않지만 장이 기능을 못하면 바로 숨이 끊어진다는 사실이다. 장뇌만 가진 촉수동물들의 끈덕진 재현은 신묘한 무의식적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고통과 번민에 바싹 타 들어가던 그녀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단연코 이성적 활동이 아닌 살아 숨쉬는 자체였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고통은 있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다. 단지 상대적 차이가 있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고통을 대하는 태도다. 퀴블러 로스(E. Kubler Ross, 1926~2004)는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를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의 5단계로 나누었다. 생물학적 죽음뿐만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정신적 충격들이 포함될 수 있다고 볼 때, 거의 10여 년에 달하는 전작가의 작업세계에서 우리는 위 단계들에 상응하는 양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008년도까지의 작업들을 보면, 그녀는 캔버스나 종이류가 아닌 인화용지나 합성피혁을 사용했을 만큼 선명한 발색을 원했다. 이때, 고통의 산물인 촉수동물의 형태와 화려한 색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이런 이율배반적인 배합은 주목을 끌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감추려고 하는 심리는 첫 번째 단계인 ‘부정’에 해당하며, 화려한 색채로 치장한 고통의 이미지들은 현실거부를 위한 위장술의 한 양태로 읽힐 수 있다. 
 
퀴블러의 각 단계와 그녀의 작품들 사이의 흥미로운 조응들 가운데, 2013년도 개인전(‘번뇌의 변태’, 오픈 스페이스 배)은 단연코 눈에 띈다. 퀴블러가 제시한 네 번째 단계인 ‘우울’은 현실인정과 직시를 특징으로 하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것과 드라마틱하게 상응한다. 드로잉 화면 속에는 인간의 형상이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없고 접힌 살덩어리가 강조되어 있다. 특히 예민한 선과 흑백의 톤이 강조될 수 밖에 없는 연필 드로잉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였다는 점은 이색적이다.
 
음울한 흑백톤은 드로잉이 아닌 회화작품 <Practice being human>(2013)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녀의 작품들 가운데 이 정도로 검은 톤이 많이 할애된 회화는 아마 전무후무할 것이다. 이는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발색을 통해 우울함을 감추던 ‘조증의 위장술’과 달리, 부조리한 삶에 대한 직설적인 감정을 감추지 않은 형식이라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실제로 이시기 후부터 그녀 작품에는 더 이상 ‘조증’을 연상시키는 색톤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여전히 원색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practice being human,45x33cm,종이에 연필, 2013     ©전희경

 

▲ Practice being human,91x116cm,캔버스 위의 아크릴,2013     ©전희경

 



새로 짓기 위해 흔들다.
2014 신작들은 실상 죽음의 ‘수용’의 단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준다. 신작들의 유기체적 오브제들은 그 형태가 거의 해체되어, 배경을 파고들거나 덮거나 흔들어대는 파괴적인 양상을 띤다. 화면은 머지않아 폭발할 것처럼 무질서의 에너지가 고조되어 있다. 이는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실제로 신작 <연무도>(2014)와 <Moon Scene>(2014) 두 점은 그간의 정처 없던 부유로부터 또박또박 보행으로의 변화를 뚜렷이 보여준다. <연무도>에서 하얀 안개들은 이미 그려진 과거의 형상들을 막강한 힘으로 뒤덮는다. 마치 죽은 자의 유품을 흰 보로 씌워 삶과 죽음의 세계에 작별을 고하는 명백한 경계를 지우 듯 말이다. 
 

▲ 연무도,182x61cm,캔버스위의 아크릴,2014     © 전희경

 

▲ Moon scene, 50x72cm, 캔버스 위의 아크릴, 2014     ©전희경

 


또한 < Moon Scene>은 지금까지의 작업들과 확연히 다른 구도를 보인다. 거의 대부분 올 오버 구성이던 작업들 가운데 처음으로 구심점으로서의 정원(正圓)을 그려 넣은 변화이다. 마치 그녀의 다음 목표지점을 알려주듯이, 그 큰 원안에는 보다 실제적인 형태의 점묘산수가 그려져 있다. 지금까지의 유토피아가 혼돈과 배설의 장이었음을 직시하고, 이제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려는 의지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삶의 고통을 내적 억압과 예술적 배설로 승화해 온 그녀는, 하나의 주제를 향한 솔직 당당한 열정을 견지하며 이 방황의 지도들을 완성해 가고 있다. 그 시작이 상처 치유를 위한 도피였다면, 이제는 아픔을 직시하는 용기와 어렴풋한 희망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다. 마치 멀리 떠나보면 집의 고마움을 알 듯, 현실에서 도망쳐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답이 나온다. 전희경의 유토피아는 그런 삶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여정인 것이다.
 
아픔의 흔적들을 그대로 토해내거나, 이상과 현실 혹은 예술과 삶 사이에 갈등하는 것은 청춘의 시그널이자, 결과적으로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제 그 어둡고 길었던 터널의 끝자락에 서있는 만큼, 모두 흔들어 헐고 지을 그녀의 새집이 궁금하다. 물론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곳, 지금까지 살았고 앞으로도 살아갈 바로 그 땅 위의 집이다.
유토피아는 이제 필요 없다.
 

 

▲ To Be a Man, 12x12cm,타이완종이 위에 연필,2013     © 전희경

 


 
 
"Utopia in Emptiness_그곳의 유토피아" 전희경展, 8.1 ~ 9.14, 롯데갤러리 중동점
 
 
전희경(Jeikei_Jeon Heekyoung)

2009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2005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개인전
2014. 'Utopia in Emptiness' 갤러리 고도, 서울
2013 “Ou_Topia’ 관두미술관, 타이페이예술대학, 타이페이, 대만
2013 ‘Island in Utopia’ 261 스튜디오, 타이동 철도예술촌, 타이동, 대만
2013 ‘번뇌의 변태’ 오픈스페이스 배, 부산
2011 신진작가공모 당선전’현실과 이상의 간극, 또는 연옥’ AG 갤러리,서울
2006 신진작가공모 YAP, 전희경 개인전, 정 갤러리, 서울

 
단체전
2014 브리츠 아트페어, 네모스퀘어, 이태원, 서울
2014 ‘ 일과 생활, 생활과 일’ 신한갤러리 역삼, 서울(예정)
2014 ‘리마인딩 스페이스’ 오픈스페이스배, 부산(예정)
2014 ‘축발전’ 메이 페스타, 스페이스 오뉴월 기획, 서울
2014 ‘반야지’ 프로젝트 스페이스, 반야지, 대전
2014 아트쇼부산 ‘ 영아티스트 어워드’ 벡스코, 부산
2014 당인리 아트서비스 아트마켓 프로젝트, 갤러리 보는, 서울

 
레지던시
2013 관두미술관 (타이페이 예술대학 내),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 타이페이, 대만
2013 타이동 철도 예술촌,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타이동,대만
2012 타이동 미술관,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 타이동, 대만
2011 오픈 스페이스 배, 국제 레지던시 오픈 투 유, 부산
2009 분다눈 트러스트,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 뉴사우스웨일 주, 호주

 
출판
2013 서른셋_라이프 댄 아트, 독립출판   
2011  서른살, 독립출판

 
수상
2013 겸재정선기념과 ‘내일의작가’ 대상

 
작품소장
2012 국립현대미술관_미술은행 
2013 대만 타이동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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