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崔承喜 舞踊映像 (일본과 러시아에서 구매 상담중입니다. 가격이 너무 높아서 결론이 나지 않네요.) 당시 공연 포스터. 공연사진. 비평문 또한 가격이 높아서 현재 거래가 어렵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손기정과 만났던 사진을 직접 현장에서 촬영했던 기자의 따님과 가격 조율중입니다. 멍멍이'룰루'기자와 청거북이 '랄라' 기자가 [아령]님과 함께 가격협상단에 합류하셨습니다.
1962년 조선
맑은 하늘에 새가 울면 사랑의 노래 부르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세요
저녁 종소리 들려오면 세레나데 부르면서 사랑을 속삭이며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세요
이태리의 정원- 최승희
オープニング映像(試案)
조선민족무용기본 최승희 저
舞踊家《崔承喜》/무용가 《최승희》(1911년 11월 24일~1969년 8월 8일)
1910年 日本が韓国を併合
1911年 ソウルの裕福な家庭に二男二女の末っ子として生まれる。 一説には、 江原道洪天で生まれたと
2005年に洪天郡守が内外に宣言。
1922年 小学校を飛び級で卒業。淑明高等女学校に入学。 すべての学科でトップクラスの成績をあげるが、 特に音楽・舞踊の成績が良かった。
1925年 15歳で同校を卒業。
1926年 兄承一に誘われて石井漠舞踊団京城公演を観る。周囲の反対を説得し、石井漠を頼り渡日。
1927年 石井漠の京城公演で 「セレナーデ」でデビュ 。
1929年 石井漠舞踊団を離れて、京城に崔承喜舞踊研究所を設立。
1930年「第1回創作舞踊発表会」を京城で開催。
1932年までに9回の発表会を催し 、京城だけでなく朝鮮各地でも興行する。
この頃、 朝鮮舞踊と鼓を名手韓成俊から手ほどきを受ける。
1931年 兄承一らの紹介で、プロレタリア文学者安粥承(安漠)を知り、 結婚する。安弼承が、 抗日・朝鮮独立運動に連座した疑いで逮捕される。
1932年 長女安勝子(安聖姫)を出産。
1933年 舞踊活動が困難になり 、一家で石井漢のもとに一時身を寄せる。
1934年 「第1回新作舞踊発表会」を日本青年館で催し、川端康成など多くの文化人・知識人が賛辞を送る。 音楽映画 「百万人の合唱」に幼稚園の先生役として初めて映画出演。 安粥承は石井漢の名をもらい安漠とし、崔承喜のプロデューサーとしての役割を果たす。
1935年 九段に崔承喜舞踊研究所を設立、 第2回新作舞踊発表会(第3回も)を日比谷公会堂で催す。この頃から、学用品、化組品、菓子などの宣伝モデルに頻繁に登城するようになる。
1936年 自身の半生が描かれた映画 「半島の舞姫」(今日出海監醤)に出演。 西条八十詞 「郷愁の舞姫」 「祭りの夜」の2曲をレコーディングする。 第3回新作舞踊発表会を催す。著作 「私の自叙伝」を出版。
1937年 渡欧告別新作発表会を東京劇場で催し、娘勝子が初舞台。招聘されサンアランシスコで第1回海外公演を催す。
1938年 ロサンゼルス、 ニューヨ ―クで公演。ニュー ヨ ―クで世界的舞踊家として認められる。しかし 、在米朝鮮人活動家から崔承喜は日本に利用されていると批判され、 公演が何度も中止される。
1939年 「コリアンダンサー」と銘打ってパリ公演、 好評を博す。 観客には、 ピカソ、 ジャンコクト 一、 ロマンロランなどがいた。 周恩来も留学生時にパリで崔承喜の公演を観たと後に語っている。 続いてヨーロッパ各地で巡回公演し、名声を高め、国際的地位を固める。ブリュッセルの第 2回国際舞踊コンクールで審査員を務める。 第2次世界大戦の勃発でヨ ―ロッパを脱出、再びニューヨークで公演し、ストコフスキー、 スタインベックも鑑賞した。
1940年 アメリカ、 中南米各地で巡回公演した後、 日本に戻る。
1941年 日本各地を巡回した後、朝鮮、満州(現在の中国東北地方)にも行き、百回以上の公演をする。この時、朝鮮の郷土舞踊を研究、収集する。東京劇場で新作舞踊公演。日本の古典舞踊を取り入れた創作も発表。
1942年 朝鮮、中国、満州で慰問を兼ねて130回以上の公演。
この時、中国舞踊に関心を示す。帝国劇場で17日間240回の連続公演。
1943年 中国、 満州各地で慰問を兼ねて公演。連日満員の記録的成功を収める。
1944年 帝国劇場で20日間23回の連続公演、 成功を収める。
朝鮮、中国で公演をした後、日本敗戦まで北京を根拠に、梅蘭芳について中国の古典舞踊を学ぶかたわら、「崔承喜舞踊短期訓練隊」を設立、 朝鮮舞踊の普及に努める。
1945年 長男の秉建を出産。 日本軍の慰問先で終戦を迎える。 戦後設立された朝鮮文学建設央協議会から「親日派芸術家」と批判される。
1946年 ソウルに帰り、安漠ら総勢13名と麻浦の渡し場を下って仁川から共和国に入国する。
1947年 「崔承喜舞踊研究所」を設立。以後3年間、朝鮮舞踊をはじめ、中国、西洋舞踊なども教える。 平壌地区の代議員に当選。
1948年 平壌で聞かれた南北連席会議歓迎会で公演。 安聖姫、世界青年平和友好祭舞踊の舞でグランプリ受賞。 崔承喜、ブタペストの世界婦人会議に参加。
1949年 安漠、平壌音楽学校学長になる。 北京のアジア婦人大会に安聖姫とともに参加。
4月7日、 民族舞踊劇 「半夜月城曲」初演。 1950年 訪ソ芸術団としてソ連各地を公演。 6月25日、朝鮮戦争勃発。 安聖姫はソウルをはじめ、韓国各地で人民軍慰問の公演をし、九死に一生を得て共和国に帰る。一家で北京に避難。
1951年 周恩来の支援を得て、北京の中央戯劇学院に崔承喜舞踊訓練班を設立。後進の養成とともに、京劇の改革にも参加。中国各地を公演。 共和国政府より国旗勲章第2級を受ける。 安聖姫、 第3回ベルリン世界青年学生平和祝典舞踊コンクールでl位に入賞。
1952年~1953年 舞踊家同盟委員長になり舞踊研究所が国立になる。人民俳優の称号を受ける。 安漠、文化部副部長(副大臣)に就任。 安聖姫、ソ連留学。
1955年 崔承喜舞踊生活30周年記念公演。“私の舞踊生活30周年を迎えて”発表。8月14日、民族舞踊劇 「沙道城物語」初演。
1956年 安聖姫、 モスクワ留学を終え帰国。 モランボン劇場でリサイタルを行い、金日成主席も観覧する。 崔承喜、舞踊団を率いて東欧各地を巡回公演する。
1 0月4日、民族舞踊劇 「光明」初演。
1957年 モスクワ第6回青年学生平和友好祭で民族舞踊部内の審査員を務め、 そこで石井漠夫安らと再会する。 日本の文化人 ・ 知識人らが「崔承喜舞踊団招聘委員会」を結成、署名活動までするが、実現しなかった。 9月、崔承喜舞踊団(100名、団長:崔承喜)ソ連、フやルガリア、アルバニア、 チェコスロバキアの32都市で公演。 10月、世界青年平和友好祭モスクワ大会祝典民族舞踊部内審査員を務める。 10月、雑誌 「朝鮮芸術」 にソ・マンイル(文学家同盟書記長)「朝鮮を輝かせて」 で崔承喜の半生を12回にわたり掲載。「崔承喜舞踊劇台本集」 を出版。 1958年3月15日、朝鮮芸術出版社より 「朝鮮民族舞踊基本l 」発刊。 金日成主席の10月14日の教示により崔承喜自己批判する。 4月18日、民族舞踊劇「玉蓮池の伝説」初演。 9月30日、「朝鮮民族舞踊基本」(Ⅱ)を発刊。 1959年3月13日 、民族郷踊劇「赤い志の人たち」初演。 9月8目 、共和国創建10周年を記念して、3,000名が出演する音楽舞踊叙事詩 「栄えあるわが祖国」で総安舞を担当し、自己批判から復帰。 1960年崔承喜、在日朝鮮人帰国者の迎接委員になる。 1月31日、清津港に俳優の黄徹、 歌手の金完羽らとともに永田絃次郎(金永吉)を迎える。 8月14日、民族舞踊劇「赤い昭光」初演。 8月29日、民族舞踊劇「日が昇る時」初演。 1961年 崔承喜、文芸総の中央委員、続いて祖国統一中央委員になる。 崔承喜誕生50周年記念公演を平壌大劇場で行う。 映像「朝鮮民族舞踊基本」撮影。 4月16日、民族舞踊劇「桂月香」初演。 7月、舞踊叙事詩「大同江のほとりで」初演。 1964年2月28日、朝鮮文化芸術総同盟出版社より 「朝鮮児童舞踊基本」出版。 1965年JO月、論文「労働党時代に燦然と花開く舞踊芸術」を発表。共和国での20年間の舞踊全般を総話。 1966年共和国の文学新聞に「朝鮮舞踊の動作と、その技法の優秀性及び民族的特性」を発表。 1967年朝日新聞に崔承喜一家が監禁された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る。 1969年8月8日 、死亡 1994年5月、金日成主席、回顧録“世紀とともに”第5巻で、崔承喜を評価。 1995年5月、金正日国防委員長が崔承喜の甥であるチェ・ヒョソブ(舞踊家)、 チェ・ロサ(詩人)と会い、崔承喜が名誉回復したことを直接伝える。 2003年2月12日 、平壌兄弟山区域愛国烈士陵に安置される。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습니다 1911년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일설에는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고 2005년 홍천군수가 내외에 선언했습니다. 1922년 초등학교를 월반으로 졸업했습니다.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모든 학과에서 정상급 성적을 올리는데 특히 음악 무용 성적이 좋았어요. 1925년 15세에 이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26년 형 쇼이치의 권유로 이시이 막무무용단 경성공연을 봅니다.주위의 반대를 설득해 이시이 막부를 의지해 도일입니다. 1927년 이시이 막의 경성공연에서 '세레나데'로 데뷔했습니다. 1929년 이시이 막무용단을 떠나 경성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1930년 '제1회 창작무용 발표회'를 경성에서 개최했습니다. 1932년까지 9회의 발표회를 개최하여 경성뿐만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도 흥행합니다. 요즘 조선무용과 북을 명수 한성준으로부터 손풀림을 받습니다. 1931년 형 승일 등의 소개로 프롤레타리아 문학가 안죽승(安竹承)을 알게 되고 결혼합니다.안필승이 항일조선독립운동에 연좌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1932년 맏딸 안승자(安勝子)를 출산했습니다. 1933년 무용 활동이 어려워져 일가가 이시이 한(石井漢)의 품에 잠시 몸을 담았습니다. 1934년 「제1회 신작 무용 발표회」를 일본 청년관에서 개최해, 카와바타 야스나리 등 많은 문화인·지식인이 찬사를 보냅니다. 음악영화 '백만 명의 합창'에 유치원 선생님 역으로 처음 영화 출연입니다. 안죽승은 석정한의 이름을 받아 안막하고 최승희의 프로듀서 역할을 합니다. 1935년 9단에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설립, 제2회 신작 무용 발표회(제3회도)를 히비야 공회당에서 개최합니다.이때부터 학용품, 화조품, 과자 등 홍보모델로 자주 등성하게 됩니다. 1936년 자신의 반생이 그려진 영화 '반도의 무희'(오늘 출해감장)에 출연했습니다. 사이조 80사 「향수의 무희」 「축제의 밤」의 2곡을 레코딩합니다. 제3회 신작 무용 발표회를 개최합니다.저작 '나의 자서전'을 출판했습니다. 1937년 도유럽 고별 신작 발표회를 도쿄 극장에서 개최하여 딸 가쓰코가 첫 무대입니다.초빙되어 샌 앨런 시스코에서 제1회 해외 공연을 개최합니다. 1938년 로스앤젤레스 뉴욕에서 공연했습니다.뉴욕에서 세계적 무용가로 인정받습니다.그러나 재미교포 활동가들로부터 최승희는 일본에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공연이 여러 번 취소됩니다. 1939년 '코리안 댄서'라는 이름으로 파리 공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관객으로는 피카소(、カ 一), 장콕토일(、ンクトー), 로만로랑(いたンロラン) 등이 있었습니다. 저우은래도 유학생 때 파리에서 최승희의 공연을 봤다고 나중에 말했습니다. 이어 유럽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통해 명성을 높이고 국제적 위상을 다집니다.브뤼셀의 제2회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을 맡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유럽을 탈출해 다시 뉴욕에서 공연했고 스토코프스키, 스타인벡도 감상했습니다. 1940년 미국, 중남미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한 후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1941년 일본 각지를 순회한 뒤 조선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지방)에도 가서 백 번 이상 공연을 합니다.이때 조선의 향토무용을 연구, 수집합니다.도쿄 극장에서 신작 무용 공연입니다.일본 고전 무용을 도입한 창작도 발표했습니다. 1942년 조선, 중국, 만주에서 위문을 겸해 130회 이상의 공연입니다. 이때 중국 무용에 관심을 보입니다.제국극장에서 17일간 240회의 연속 공연입니다. 1943년 중국 만주 각지에서 위문을 겸해 공연했습니다.연일 만원의 기록적 성공을 거두어요. 1944년 제국극장에서 20일간 23회의 연속 공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조선, 중국에서 공연을 한 후 일본 패전까지 베이징을 근거로 매란방에 대해 중국 고전무용을 배우는 한편 '최승희 무용 단기훈련대'를 설립, 조선무용 보급에 힘쓸 것입니다. 1945년 장남 병건을 출산했습니다. 일본군의 위문지에서 종전을 맞이합니다. 전후 설립된 조선문학건설중앙협의회로부터 친일파 예술가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1946년 서울로 돌아와 안막 등 총 13명과 마포나루를 내려와 인천에서 공화국으로 입국합니다. 1947년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이후 3년간 조선무용을 비롯해 중국, 서양무용 등도 가르칩니다. 평양지구 대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1948년 평양에서 들은 남북연석회의 환영회에서 공연했습니다. 안성희, 세계청년평화우호제 무용춤으로 그랑프리 수상입니다. 최승희, 부타페스트 세계부인회의에 참석합니다. 1949년 안막 평양음악학교 학장이 됩니다. 베이징 아시아 부인 대회에 안성희와 함께 참가합니다. 4월 7일 민족무용극 '반야월성곡' 초연입니다. 1950년 방소예술단으로서 소련 각지를 공연했습니다.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입니다. 안성희는 서울을 비롯한 한국 각지에서 인민군 위문 공연을 하고 구사일생으로 공화국으로 돌아갑니다.일가가 베이징(北京)으로 피난을 갑니다. 1951년 저우언라이의 지원을 받아 베이징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 무용훈련반을 설립했습니다.후진 양성과 함께 경극 개혁에도 참여했습니다.중국 각지를 공연합니다. 공화국 정부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습니다. 안성희, 제3회 베를린 세계청년학생평화축전 무용콩쿠르에서 l위 입상했습니다. 1952년 ~ 1953년 무용가동맹위원장이되고무용연구소가국립이됩니다.인민배우 칭호를 받습니다. 안막, 문화부 부부장(부대신)에 취임했습니다. 안성희 소련 유학입니다. 1955년 최승희 무용생활 30주년 기념 공연입니다."저의 무용생활 3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입니다.8월 14일 민족무용극 '사도성 이야기' 초연입니다. 1956년 안성희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모란봉 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하고 김일성 주석도 관람합니다. 최승희 무용단 이끌고 동유럽 각지 순회공연합니다. 10월 4일 민족무용극 광명 초연입니다. 1957년 모스크바 제6회 청년학생평화우호제에서 민족무용부내 심사위원을 맡아 이시이 막부야스 등과 재회합니다. 일본 문화인·지식인들이 '최승희 무용단 초빙위원회'를 결성, 서명 활동까지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9월 최승희 무용단(100명단장 최승희) 소련, 후와 루갈리아, 알바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32개 도시에서 공연합니다. 10월 세계청년평화우호제 모스크바대회 축전 민족무용부 내 심사위원을 맡습니다. 10월 잡지 '조선예술'에 소망일(문학가동맹 서기장) '조선을 빛내줘'에서 최승희의 반생을 12회에 걸쳐 게재했습니다.최승희 무용극 대본집 출간합니다. 1958년 3월 15일 조선예술출판사에서 '조선민족무용기본l' 발간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10월 14일 교시에 따라 최승희 자기비판합니다. 4월 18일 민족무용극 '옥련지의 전설' 초연입니다. 9월 30일 '조선민족무용기본'(Ⅱ)을 발간합니다. 1959년 3월 13일 민족향 춤극 '붉은 뜻의 사람들' 초연입니다. 9월 8일 공화국 창건 10주년을 기념하여 3,000명이 출연하는 음악무용 서사시 『영원한 나의 조국』에서 총안무를 담당하며 자기비판에서 복귀합니다. 1960년 최승희, 재일교포 귀국자 영접위원이 됩니다. 1월 31일 청진항에 배우 황철, 가수 김완우 등과 함께 나가타 겐지로(김영길)를 맞이합니다. 8월 14일 민족무용극 '붉은 소광' 초연입니다. 8월 29일 민족무용극 '해가 뜰 때' 초연입니다. 1961년 최승희, 문예총 중앙위원, 이어서 조국통일 중앙위원이 됩니다. 최승희 탄생 50주년 기념 공연을 평양대극장에서 합니다. 영상 '조선민족무용기본' 촬영입니다. 4월 16일 민족무용극 '계월향' 초연입니다. 7월 무용 서사시 '대동강변에서' 초연입니다. 1964년 2월 28일 조선문화예술총동맹 출판사에서 '조선아동무용기본' 출간했습니다. 1965년 JO월, 논문 「노동당 시대에 찬연히 꽃피우는 무용 예술」을 발표했습니다. 공화국에서의 20년간의 무용 전반을 총화입니다. 1966년 공화국 문학신문에 '조선무용의 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을 발표했습니다. 1967년 아사히 신문에 최승희 가족이 감금되었다는 기사가 게재됩니다. 1969년 8월 8일 사망했습니다. 1994년 5월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함께" 제5권에서 최승희를 평가했습니다. 1995년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승희의 조카인 최효섭(무용가), 최로사(시인)를 만나 그가 명예회복을 했음을 직접 전합니다. 2003년 2월 12일 평양 형제산 구역 애국열사릉에 안치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GchF6S2iNE 崔承喜 舞踊映像 1962년 조선 맑은 하늘에 새가 울면 사랑의 노래 부르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세요 저녁 종소리 들려오면 세레나데 부르면서 사랑을 속삭이며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세요
이태리의 정원- 최승희 (영화-밤의해변에서 혼자)
オープニング映像(試案) 조선민족무용기본 최승희 저 舞踊家《崔承喜》/무용가 《최승희》(1911년 11월 24일~1969년 8월 8일)
1910年 日本が韓国を併合 1911年 ソウルの裕福な家庭に二男二女の末っ子として生まれる。 一説には、 江原道洪天で生まれたと2005年に洪天郡守が内外に宣言。 1922年 小学校を飛び級で卒業。淑明高等女学校に入学。 すべての学科でトップクラスの成績をあげるが、 特に音楽・舞踊の成績が良かった。 1925年 15歳で同校を卒業。 1926年 兄承一に誘われて石井漠舞踊団京城公演を観る。周囲の反対を説得し、石井漠を頼り渡日。 1927年 石井漠の京城公演で 「セレナーデ」でデビュ 。 1929年 石井漠舞踊団を離れて、京城に崔承喜舞踊研究所を設立。 1930年「第1回創作舞踊発表会」を京城で開催。 1932年までに9回の発表会を催し 、京城だけでなく朝鮮各地でも興行する。 この頃、 朝鮮舞踊と鼓を名手韓成俊から手ほどきを受ける。 1931年 兄承一らの紹介で、プロレタリア文学者安粥承(安漠)を知り、 結婚する。安弼承が、 抗日・朝鮮独立運動に連座した疑いで逮捕される。 1932年 長女安勝子(安聖姫)を出産。 1933年 舞踊活動が困難になり 、一家で石井漢のもとに一時身を寄せる。 1934年 「第1回新作舞踊発表会」を日本青年館で催し、川端康成など多くの文化人・知識人が賛辞を送る。 音楽映画 「百万人の合唱」に幼稚園の先生役として初めて映画出演。 安粥承は石井漢の名をもらい安漠とし、崔承喜のプロデューサーとしての役割を果たす。 1935年 九段に崔承喜舞踊研究所を設立、 第2回新作舞踊発表会(第3回も)を日比谷公会堂で催す。この頃から、学用品、化組品、菓子などの宣伝モデルに頻繁に登城するようになる。 1936年 自身の半生が描かれた映画 「半島の舞姫」(今日出海監醤)に出演。 西条八十詞 「郷愁の舞姫」 「祭りの夜」の2曲をレコーディングする。 第3回新作舞踊発表会を催す。著作 「私の自叙伝」を出版。 1937年 渡欧告別新作発表会を東京劇場で催し、娘勝子が初舞台。招聘されサンアランシスコで第1回海外公演を催す。 1938年 ロサンゼルス、 ニューヨ ―クで公演。ニュー ヨ ―クで世界的舞踊家として認められる。しかし 、在米朝鮮人活動家から崔承喜は日本に利用されていると批判され、 公演が何度も中止される。 1939年 「コリアンダンサー」と銘打ってパリ公演、 好評を博す。 観客には、 ピカソ、 ジャンコクト 一、 ロマンロランなどがいた。 周恩来も留学生時にパリで崔承喜の公演を観たと後に語っている。 続いてヨーロッパ各地で巡回公演し、名声を高め、国際的地位を固める。ブリュッセルの第 2回国際舞踊コンクールで審査員を務める。 第2次世界大戦の勃発でヨ ―ロッパを脱出、再びニューヨークで公演し、ストコフスキー、 スタインベックも鑑賞した。 1940年 アメリカ、 中南米各地で巡回公演した後、 日本に戻る。 1941年 日本各地を巡回した後、朝鮮、満州(現在の中国東北地方)にも行き、百回以上の公演をする。この時、朝鮮の郷土舞踊を研究、収集する。東京劇場で新作舞踊公演。日本の古典舞踊を取り入れた創作も発表。 1942年 朝鮮、中国、満州で慰問を兼ねて130回以上の公演。 この時、中国舞踊に関心を示す。帝国劇場で17日間240回の連続公演。 1943年 中国、 満州各地で慰問を兼ねて公演。連日満員の記録的成功を収める。 1944年 帝国劇場で20日間23回の連続公演、 成功を収める。 朝鮮、中国で公演をした後、日本敗戦まで北京を根拠に、梅蘭芳について中国の古典舞踊を学ぶかたわら、「崔承喜舞踊短期訓練隊」を設立、 朝鮮舞踊の普及に努める。 1945年 長男の秉建を出産。 日本軍の慰問先で終戦を迎える。 戦後設立された朝鮮文学建設央協議会から「親日派芸術家」と批判される。 1946年 ソウルに帰り、安漠ら総勢13名と麻浦の渡し場を下って仁川から共和国に入国する。 1947年 「崔承喜舞踊研究所」を設立。以後3年間、朝鮮舞踊をはじめ、中国、西洋舞踊なども教える。 平壌地区の代議員に当選。 1948年 平壌で聞かれた南北連席会議歓迎会で公演。 安聖姫、世界青年平和友好祭舞踊の舞でグランプリ受賞。 崔承喜、ブタペストの世界婦人会議に参加。 1949年 安漠、平壌音楽学校学長になる。 北京のアジア婦人大会に安聖姫とともに参加。 4月7日、 民族舞踊劇 「半夜月城曲」初演。 1950年 訪ソ芸術団としてソ連各地を公演。 6月25日、朝鮮戦争勃発。 安聖姫はソウルをはじめ、韓国各地で人民軍慰問の公演をし、九死に一生を得て共和国に帰る。一家で北京に避難。 1951年 周恩来の支援を得て、北京の中央戯劇学院に崔承喜舞踊訓練班を設立。後進の養成とともに、京劇の改革にも参加。中国各地を公演。 共和国政府より国旗勲章第2級を受ける。 安聖姫、 第3回ベルリン世界青年学生平和祝典舞踊コンクールでl位に入賞。 1952年~1953年 舞踊家同盟委員長になり舞踊研究所が国立になる。人民俳優の称号を受ける。 安漠、文化部副部長(副大臣)に就任。 安聖姫、ソ連留学。 1955年 崔承喜舞踊生活30周年記念公演。“私の舞踊生活30周年を迎えて”発表。8月14日、民族舞踊劇 「沙道城物語」初演。 1956年 安聖姫、 モスクワ留学を終え帰国。 モランボン劇場でリサイタルを行い、金日成主席も観覧する。 崔承喜、舞踊団を率いて東欧各地を巡回公演する。 1 0月4日、民族舞踊劇 「光明」初演。 1957年 モスクワ第6回青年学生平和友好祭で民族舞踊部内の審査員を務め、 そこで石井漠夫安らと再会する。 日本の文化人 ・ 知識人らが「崔承喜舞踊団招聘委員会」を結成、署名活動までするが、実現しなかった。 9月、崔承喜舞踊団(100名、団長:崔承喜)ソ連、フやルガリア、アルバニア、 チェコスロバキアの32都市で公演。 10月、世界青年平和友好祭モスクワ大会祝典民族舞踊部内審査員を務める。 10月、雑誌 「朝鮮芸術」 にソ・マンイル(文学家同盟書記長)「朝鮮を輝かせて」 で崔承喜の半生を12回にわたり掲載。「崔承喜舞踊劇台本集」 を出版。 1958年3月15日、朝鮮芸術出版社より 「朝鮮民族舞踊基本l 」発刊。 金日成主席の10月14日の教示により崔承喜自己批判する。 4月18日、民族舞踊劇「玉蓮池の伝説」初演。 9月30日、「朝鮮民族舞踊基本」(Ⅱ)を発刊。 1959年3月13日 、民族郷踊劇「赤い志の人たち」初演。 9月8目 、共和国創建10周年を記念して、3,000名が出演する音楽舞踊叙事詩 「栄えあるわが祖国」で総安舞を担当し、自己批判から復帰。 1960年崔承喜、在日朝鮮人帰国者の迎接委員になる。 1月31日、清津港に俳優の黄徹、 歌手の金完羽らとともに永田絃次郎(金永吉)を迎える。 8月14日、民族舞踊劇「赤い昭光」初演。 8月29日、民族舞踊劇「日が昇る時」初演。 1961年 崔承喜、文芸総の中央委員、続いて祖国統一中央委員になる。 崔承喜誕生50周年記念公演を平壌大劇場で行う。 映像「朝鮮民族舞踊基本」撮影。 4月16日、民族舞踊劇「桂月香」初演。 7月、舞踊叙事詩「大同江のほとりで」初演。 1964年2月28日、朝鮮文化芸術総同盟出版社より 「朝鮮児童舞踊基本」出版。 1965年JO月、論文「労働党時代に燦然と花開く舞踊芸術」を発表。共和国での20年間の舞踊全般を総話。 1966年共和国の文学新聞に「朝鮮舞踊の動作と、その技法の優秀性及び民族的特性」を発表。 1967年朝日新聞に崔承喜一家が監禁された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る。 1969年8月8日 、死亡 1994年5月、金日成主席、回顧録“世紀とともに”第5巻で、崔承喜を評価。 1995年5月、金正日国防委員長が崔承喜の甥であるチェ・ヒョソブ(舞踊家)、 チェ・ロサ(詩人)と会い、崔承喜が名誉回復したことを直接伝える。 2003年2月12日 、平壌兄弟山区域愛国烈士陵に安置される。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습니다 1911년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일설에는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고 2005년 홍천군수가 내외에 선언했습니다. 1922년 초등학교를 월반으로 졸업했습니다.숙명고등여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모든 학과에서 정상급 성적을 올리는데 특히 음악 무용 성적이 좋았어요. 1925년 15세에 이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26년 형 쇼이치의 권유로 이시이 막무무용단 경성공연을 봅니다.주위의 반대를 설득해 이시이 막부를 의지해 도일입니다. 1927년 이시이 막의 경성공연에서 '세레나데'로 데뷔했습니다. 1929년 이시이 막무용단을 떠나 경성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1930년 '제1회 창작무용 발표회'를 경성에서 개최했습니다. 1932년까지 9회의 발표회를 개최하여 경성뿐만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도 흥행합니다. 요즘 조선무용과 북을 명수 한성준으로부터 손풀림을 받습니다. 1931년 형 승일 등의 소개로 프롤레타리아 문학가 안죽승(安竹承)을 알게 되고 결혼합니다.안필승이 항일조선독립운동에 연좌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1932년 맏딸 안승코(安勝子)를 출산했습니다. 1933년 무용 활동이 어려워져 일가가 이시이 한(石井漢)의 품에 잠시 몸을 담았습니다. 1934년 「제1회 신작 무용 발표회」를 일본 청년관에서 개최해, 카와바타 야스나리 등 많은 문화인·지식인이 찬사를 보냅니다. 음악영화 '백만 명의 합창'에 유치원 선생님 역으로 처음 영화 출연입니다. 안죽승은 석정한의 이름을 받아 안막하고 최승희의 프로듀서 역할을 합니다. 1935년 9단에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설립, 제2회 신작 무용 발표회(제3회도)를 히비야 공회당에서 개최합니다.이때부터 학용품, 화조품, 과자 등 홍보모델로 자주 등성하게 됩니다. 1936년 자신의 반생이 그려진 영화 '반도의 무희'(오늘 출해감장)에 출연했습니다. 사이조 80사 「향수의 무희」 「축제의 밤」의 2곡을 레코딩합니다. 제3회 신작 무용 발표회를 개최합니다.저작 '나의 자서전'을 출판했습니다. 1937년 도유럽 고별 신작 발표회를 도쿄 극장에서 개최하여 딸 가쓰코가 첫 무대입니다.초빙되어 샌 앨런 시스코에서 제1회 해외 공연을 개최합니다. 1938년 로스앤젤레스 뉴욕에서 공연했습니다.뉴욕에서 세계적 무용가로 인정받습니다.그러나 재미교포 활동가들로부터 최승희는 일본에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공연이 여러 번 취소됩니다. 1939년 '코리안 댄서'라는 이름으로 파리 공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관객으로는 피카소(、カ 一), 장콕토일(、ンクトー), 로만로랑(いたンロラン) 등이 있었습니다. 저우은래도 유학생 때 파리에서 최승희의 공연을 봤다고 나중에 말했습니다. 이어 유럽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통해 명성을 높이고 국제적 위상을 다집니다.브뤼셀의 제2회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을 맡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유럽을 탈출해 다시 뉴욕에서 공연했고 스토코프스키, 스타인벡도 감상했습니다. 1940년 미국, 중남미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한 후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1941년 일본 각지를 순회한 뒤 조선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지방)에도 가서 백 번 이상 공연을 합니다.이때 조선의 향토무용을 연구, 수집합니다.도쿄 극장에서 신작 무용 공연입니다.일본 고전 무용을 도입한 창작도 발표했습니다. 1942년 조선, 중국, 만주에서 위문을 겸해 130회 이상의 공연입니다. 이때 중국 무용에 관심을 보입니다.제국극장에서 17일간 240회의 연속 공연입니다. 1943년 중국 만주 각지에서 위문을 겸해 공연했습니다.연일 만원의 기록적 성공을 거두어요. 1944년 제국극장에서 20일간 23회의 연속 공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조선, 중국에서 공연을 한 후 일본 패전까지 베이징을 근거로 매란방에 대해 중국 고전무용을 배우는 한편 '최승희 무용 단기훈련대'를 설립, 조선무용 보급에 힘쓸 것입니다. 1945년 장남 병건을 출산했습니다. 일본군의 위문지에서 종전을 맞이합니다. 전후 설립된 조선문학건설중앙협의회로부터 친일파 예술가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1946년 서울로 돌아와 안막 등 총 13명과 마포나루를 내려와 인천에서 공화국으로 입국합니다. 1947년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이후 3년간 조선무용을 비롯해 중국, 서양무용 등도 가르칩니다. 평양지구 대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1948년 평양에서 들은 남북연석회의 환영회에서 공연했습니다. 안성희, 세계청년평화우호제 무용춤으로 그랑프리 수상입니다. 최승희, 부타페스트 세계부인회의에 참석합니다. 1949년 안막 평양음악학교 학장이 됩니다. 베이징 아시아 부인 대회에 안성희와 함께 참가합니다. 4월 7일 민족무용극 '반야월성곡' 초연입니다. 1950년 방소예술단으로서 소련 각지를 공연했습니다.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입니다. 안성희는 서울을 비롯한 한국 각지에서 인민군 위문 공연을 하고 구사일생으로 공화국으로 돌아갑니다.일가가 베이징(北京)으로 피난을 갑니다. 1951년 저우언라이의 지원을 받아 베이징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 무용훈련반을 설립했습니다.후진 양성과 함께 경극 개혁에도 참여했습니다.중국 각지를 공연합니다. 공화국 정부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습니다. 안성희, 제3회 베를린 세계청년학생평화축전 무용콩쿠르에서 l위 입상했습니다. 1952년 ~ 1953년 무용가동맹위원장이되고무용연구소가국립이됩니다.인민배우 칭호를 받습니다. 안막, 문화부 부부장(부대신)에 취임했습니다. 안성희 소련 유학입니다. 1955년 최승희 무용생활 30주년 기념 공연입니다."저의 무용생활 3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입니다.8월 14일 민족무용극 '사도성 이야기' 초연입니다. 1956년 안성희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모란봉 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하고 김일성 주석도 관람합니다. 최승희 무용단 이끌고 동유럽 각지 순회공연합니다. 10월 4일 민족무용극 광명 초연입니다. 1957년 모스크바 제6회 청년학생평화우호제에서 민족무용부내 심사위원을 맡아 이시이 막부야스 등과 재회합니다. 일본 문화인·지식인들이 '최승희 무용단 초빙위원회'를 결성, 서명 활동까지 하지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9월 최승희 무용단(100명단장 최승희) 소련, 후와 루갈리아, 알바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32개 도시에서 공연합니다. 10월 세계청년평화우호제 모스크바대회 축전 민족무용부 내 심사위원을 맡습니다. 10월 잡지 '조선예술'에 소망일(문학가동맹 서기장) '조선을 빛내줘'에서 최승희의 반생을 12회에 걸쳐 게재했습니다.최승희 무용극 대본집 출간합니다. 1958년 3월 15일 조선예술출판사에서 '조선민족무용기본l' 발간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10월 14일 교시에 따라 최승희 자기비판합니다. 4월 18일 민족무용극 '옥련지의 전설' 초연입니다. 9월 30일 '조선민족무용기본'(Ⅱ)을 발간합니다. 1959년 3월 13일 민족향 춤극 '붉은 뜻의 사람들' 초연입니다. 9월 8일 공화국 창건 10주년을 기념하여 3,000명이 출연하는 음악무용 서사시 『영원한 나의 조국』에서 총안무를 담당하며 자기비판에서 복귀합니다. 1960년 최승희, 재일교포 귀국자 영접위원이 됩니다. 1월 31일 청진항에 배우 황철, 가수 김완우 등과 함께 나가타 겐지로(김영길)를 맞이합니다. 8월 14일 민족무용극 '붉은 소광' 초연입니다. 8월 29일 민족무용극 '해가 뜰 때' 초연입니다. 1961년 최승희, 문예총 중앙위원, 이어서 조국통일 중앙위원이 됩니다. 최승희 탄생 50주년 기념 공연을 평양대극장에서 합니다. 영상 '조선민족무용기본' 촬영입니다. 4월 16일 민족무용극 '계월향' 초연입니다. 7월 무용 서사시 '대동강변에서' 초연입니다. 1964년 2월 28일 조선문화예술총동맹 출판사에서 '조선아동무용기본' 출간했습니다. 1965년 JO월, 논문 「노동당 시대에 찬연히 꽃피우는 무용 예술」을 발표했습니다. 공화국에서의 20년간의 무용 전반을 총화입니다. 1966년 공화국 문학신문에 '조선무용의 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성'을 발표했습니다. 1967년 아사히 신문에 최승희 가족이 감금되었다는 기사가 게재됩니다. 1969년 8월 8일 사망했습니다. 1994년 5월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함께" 제5권에서 최승희를 평가했습니다. 1995년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최승희의 조카인 최효섭(무용가), 최로사(시인)를 만나 그가 명예회복을 했음을 직접 전합니다. 2003년 2월 12일 평양 형제산 구역 애국열사릉에 안치됩니다. <저작권자 ⓒ 문화예술의전당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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