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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극 - 춘향전

이혜용 기자 | 기사입력 2019/09/12 [05:07]

여성국극 - 춘향전

이혜용 기자 | 입력 : 2019/09/12 [05:07]


여성국극 춘향전

여성국극 - 견우와 직녀




정의

1948년 여성 소리꾼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여성국악동호회’에 의해 여성만 출연한 일종의 창극으로 시작하여, 195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가 1960년대 말에 사라진 민족 음악극의 하나.

내용

1909년 관기官妓 제도가 철폐되면서 누구나 기생이 될 수 있게 되자, 경기 이남의 세습무 집안, 곧 광대 집안의 여자들은 무당이 되기보다는 기생이 되는 쪽을 많이 택했다. 이들은 가곡, 가사, 시조 등 종래 기생의 노래들 외에도 판소리도 배우게 되어 1930년대에 들어 김소향, 박월정, 박녹주 등의 여성 명창들은 기생의 권번을 떠나 순수 명창으로도 활동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여성 소리꾼들이 1948년 여‘ 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여 <옥중화>(춘향전, 이도령 역 임춘앵, 춘향역 김소희)를 공연함으로써 이른바 여성국극이 시작되었다. 여성국악동호회는 1949년 2월 <햇님과 달님>(햇님 역 박귀희, 달님 역 김소희) 공연으로 흥행에 대성공을 하게 된다. 이에 ‘여성국극동지사’라는 새로운 단체도 성립되어 그해 11월 <황금돼지>(임춘앵, 박초월, 조금앵 등)를 공연하고, 이를 이어 여성국악동호회의 <햇님과 달님 후편>(박귀희, 김경희, 김소희, 조유색 등)도 공연되어 이후 <햇님과 달님>으로 대표되는 여성국극시대를 열게 된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는 때에도 임시 수도였던 부산의 부산극장을 중심으로 <사랑의 화원>(여성국극협회, 1951), <가야금>(여성국악동호회, 1951), <쌍둥왕자>(햇님국극단. 김전 작, 1952), <공주궁의 비밀>(여성국극동지사 ,1952), <바우와 진주목걸이>(여성국극동지사, 1953)등의 공연들이 성황리에 이뤄지며 여성국극의 명성을 이어갔다.
1953년 7월 6·25전쟁이 종전되면서 수도가 서울로 돌아오자 본격적인 여성국극 시대가 되었다. 종래의 여성국악동호회, 여성국극동지사, 햇님국극단 외에도 삼성여성국극단(1953), 신라여성국극단(1954), 낭랑여성국극단(1954), 화랑여성국극단(1955), 낭자국악단(1955), 여협(1955), 우리국악단(1956), 새한국극단(1956), 진경여성국극단(1957), 백도화와 그 일행(1958), 동명여성국극단(1958) 등이 차례대로 생겨나, 1955년 최전성기에는 12개 정도의 여성국극단들이 활동할 정도였다. 이 와중에 1956년 김연수창극단, 1957년 국악사, 1958년 국극사 등 종래의 남녀 혼성 창극단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여성국극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956년부터 국산 영화 진흥 정책이 시작되어 1960년대가 영화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956년 첫 방송 송출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일반 가정에서도 TV 시청이 가능해진 것도 한 원인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여성국극의 내부적 요인들도 어느 정도 있었다. 판소리를 배우거나 해서 제대로 소리를 할 수 있는 전문성 있는 출연자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갑작스런 인기몰이로 많은 여성국극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각 단체들이 종래와 같은 수준 높은 음악극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당대의 시대적 문제들을 다루지 않고 가상의 창작사극류를 주로 다루었던 종래의 창극 전통을 이어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고대사화류(古代史話類)의 낭만적인 공연, 곧 ‘옛날 어느 나라의 왕자와 공주 이야기’를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광복이나 전쟁과 같은 역사적 혼란기에 잠시 힘든 현실을 잊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상고 시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른 공연 내용, 여성들만이 한다는 것, 멋이 있고 우아하면서도 애절한 소리와 춤, 화려한 분장과 의상, 스펙터클한 무대효과, 감칠맛 나는 기악 반주 등 대중예술로서의 여러 가지 면을 갖추었기에, 여성국극은 1950년대에 일방적인 전성기를 누렸고 1960년대의 쇠퇴기에도 당분간 지속되었다. 그래서 동방국악단(1960), 송죽여성국극단(1960), 박미숙과 그 일행(1968), 이귀랑 민속예술단(1968) 등 공연단체들이 1960년대에도 여전히 새로이 생겨나 사라지곤 했다.
다음은 1953년 환도 이후 여성국극 작품들에서 주목할 만한 것들이다. <꽃과 나비>(삼성여성국극단,1954), <목동과 공주>(여성국극동지사, 1954), <해바라기>(신라여성국극단, 1954), <청사초롱>(낭랑여성국극단, 1954), <선화공주전>(햇님국극단, 1954), <무영탑>(임춘앵과 그 일행, 1955), <쌍무곡(雙舞曲)>(화랑여성국극단, 1955), <쌍둥왕자>(낭자국악단, 이일파작, 1955), <상사천리(相思千里)>(여협, 1955), <꼽추>(우리국악단, 1956), <무지개>(새한국극단, 1956), <사랑탑>(진경여성국극단, 1957), <꽃이 지기 전에>(진경여성국극단, 1958), <쌍무덤>(백도화와 그 일행, 1958) , <견우와 직녀>(임춘앵과 그 일행, 1958), <신라의 별>(우리국악단, 1958), <왕초군(王草君>(동명여성국극단,1958), <공주탑(塔)>(동방국악단, 1960), <고성(古城)의 푸른 달>(송죽여성국극단, 1960), <옛이야기>(박미숙과 그 일행. 1968).
이러한 여성국극에는 1948~1969년 동안 25개 정도의 단체들이 있었으며, 185편 정도의 신작新作들이 있었다. 짧은 여성국극 시대 동안 참으로 많은 단체들이 명멸하고 많은 작품들이 이뤄진 것이다.

특징 및 의의

여성국극의 음악은 판소리의 복잡한 시김새와 같은 음악적 방식을 버리고 ‘연극소리’라고 할 만한 단순한 선율 형태의 새로운 소리 세계로 나아간 면이 있다. 반주 악기로 북 대신 장구를 사용하고, 소리와 함께 춤도 자연스럽게 넣었으며, 창극의 도창(導唱)과 같은 것은 해설이나 합창으로 처리하거나 아예 없앰으로써 종래의 남녀 혼성 창극과는 많이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국극의 대표적 인물인 임춘행이 판소리 외에도 검무·승무·살풀이 등의 전통춤에도 명인이었듯, 이들 여성국극인들은 소리 외에도 춤·연기 등에도 뛰어나 전통적인 우리의 소리에 맞는 춤·연기·극적 진행을 갖춰 한때 매우 성공적인 음악극을 이뤄낼 수 있었다.

여성국극은 원래 창극의 연장이었으나 그 대중적 인기로 판소리의 성악 예술적 요소들을 버리고 사실상 하나의 대중예술로 나아갔다. 이 때문에 1960년대에 새로운 대중예술로 등장한 영화와 TV에 밀려 급격히 그 자리를 내주고 1960년대 말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여성국극이 판소리 계통의 음악극으로 한때 ‘민족 오페라’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예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모두 성공한 민족 음악극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1983년 이후 과거 여성국극을 했던 이일파(남), 이군자, 김향(남), 조금앵, 김진진, 김경수, 박미숙, 허소자, 김혜리, 조영숙, 홍성덕 등이 다시 여성국극 작품들을 공연하고 있다. 또한 1993년에는 홍성덕을 중심으로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가 조직되어 매년 한 편 이상의 여성국극 작품들을 올리며 현재까지도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민족의 음악극으로서의 여성국극에 대한 오늘날 우리들의 과제(손태도, 한국전통공연예술학1, 한국전통공연예술학회, 2012), 여성국극 60년사(김기형, 문화체육관광부, 2009), 여성국극 왕자 임춘앵 전기(반재식·김은신, 백중당, 2002), 판소리계통 공연예술들을 통해 본 오늘날 판소리의 나아갈 길(손태도, 판소리연구24, 판소리학회, 2007), 한국 여성국극사 연구(김병철,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7), 해방 이후의 여성국극 연구(윤수연,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6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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